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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tablealign=center><tablewidth=75%><tablebordercolor=#536349><nopad> [[파일:독일 대소 선전포고문(슐렌부르크 선언문).jpg|width=100%]] || ||<bgcolor=#536349> {{{-1 {{{#FFF '''1941년 6월 22일 오전 5시 30분(현지 시각)에 작성된[br]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문인 슐렌부르크 선언문.[br]서두는 다음과 같다.'''}}}}}} || ||<bgcolor=#536349> {{{-1 {{{#FFF "독일 동부 국경에서 적군의 전 군대가 대규모로 증강되며 준비한 그 결과로 직면한 피할 수 없는 위협을 고려하여,[br]독일 정부는 즉각적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한다.[br]해당 사항은 동시에 베를린의 데카조노프[* 당시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에게도 전달될 예정이다."[*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 문서를 데카조노프에게 건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 전해주시오. 그래도 나는 대소 전쟁을 반대했다고."] }}}}}}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nopad> [youtube(YsupHQtfr7k)] || || 독소전쟁 개전 당시의 러시아 라디오 방송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536349><bgcolor=#536349> ||<width=100%><bgcolor=#fff,#1c1d1f>{{{#!wiki style="margin: 10px" 22 июня 1941 года 1941년 6월 22일. Внимание.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Говорит Москва. [[모스크바]]에서 전해드립니다. Передаё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정부의 중대 발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сегодня в четыре часа утра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ё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인민 여러분, 오늘 새벽 4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그 어떠한 예고나 선전포고도 없이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의 군대가 국경에서의 침공을 개시했습니다]].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их народов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맞선 소비에트 인민들의 [[독소전쟁|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우리의 명분은 정당하며, 적들은 패배할 것입니다.'''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 {{{-1 '''[[유리 레비탄]], [[1941년]] [[6월 22일]] 오전 12시 15분, [[독소전쟁|대조국전쟁]] [[https://www.youtube.com/watch?v=YsupHQtfr7k|안내 방송 전문]].'''[* [[독소전쟁]] 개전 직후 스탈린이 11일간 잠수를 타면서, 개전 직후 급박한 사태를 알리는 연설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대신하였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1년]] [[7월 3일]] 라디오 방송에서 국난에 맞선 인민의 단결을 촉구하는 연설과 함께 공무로 다시 복귀한다.] [[https://www.tracesofwar.com/articles/4627/Radio-speech-by-Molotov-22-06-1941.htm|몰로토프 연설 전문(영어 번역본)]]}}}}}} ||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독일군은 동맹군까지 합쳐 3개 집단군, 총 305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만일을 대비해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지만 방어선에 적절하게 주둔시키고 방어전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국경 지역에 병력을 모아둔 것이라서 해당 조치는 오히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이 독일군에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전장 환경이 바뀌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전부 쓸려나간 게 특히 한 몫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이었다면 국경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갑군을 최초로 창설한 독일이었다. 소련군의 전차는 우수한 성능과 기동성에도 불구하고 보병 지원 이상의 역할을 배정받지 못했다. 단일한 전차 군단은 당연히 없었고, 전차들은 드넓은 소련 국경에 흩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기동성과 충격 효과가 발휘될 리가 없었다. 물론 [[브로디 전투]]처럼 개전 직전에 만들어놓은 소련 기계화군단처럼 전차를 대규모로 편제한 후 기동전을 수행하려는 조직은 있었으나 창설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부대로서의 행동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보급 및 정비 부족으로 인해 전투는 커녕 이동도 힘든 상황이 많아서 병력 규모에 비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독일 기갑군단들에게 격파당한다. 거기에다가 경직된 지휘 체계로 인해 각 부대들의 자체적인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황의 불리함을 알고 상급 부대로 집결한다던지 하는 임기응변적 대책은 물론 없었고, 소련군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다가 포위되어 죽어나갔다. 독일 기갑군이 뚫은 구멍으로 대량의 독일군이 유입되면서 전방의 소련군은 그대로 갇히고 만다. 또한 독일군의 주공인 중부집단군 쪽에 소련군 사단은 얼마 없었고, 우크라이나에만 100개 사단이 투입되어, 거대한 소련군이 양분되는 일도 발생하게 되었다. 소련의 전투기들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육군이 공중 엄호, 무기, 첩보, 통신체계도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궤멸되는 일도 잦았다. 그나마 이상 징후를 감지해 숙청될 것을 각오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토록 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의 지시 덕에 [[소련 해군]]은 급습에도 피해가 가장 적었고, 살아남은 해군 항공대들이 궤멸한 공군의 역할을 상당량 대신해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여름에 히틀러의 공격이 없을 거라고 예상한 나머지 별다른 경계태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스탈린만의 생각은 아니라서 전쟁 전에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인 [[https://en.wikipedia.org/wiki/Friedrich-Werner_Graf_von_der_Schulenburg|프리드리히베르너 폰 데어 슐렌부르크 백작]]은 독일의 소련 침공을 의심해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https://ru.wikipedia.org/wiki/%D0%94%D0%B5%D0%BA%D0%B0%D0%BD%D0%BE%D0%B7%D0%BE%D0%B2,_%D0%92%D0%BB%D0%B0%D0%B4%D0%B8%D0%BC%D0%B8%D1%80_%D0%93%D0%B5%D0%BE%D1%80%D0%B3%D0%B8%D0%B5%D0%B2%D0%B8%D1%87|블라디미르 데카조노프]]에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의심을 귀띔해줬는데 데카조노프 대사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라며 일축한 일도 있었을 정도로 소련 정계는 독일의 침공을 예상조차 안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소련은 정보를 수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기습에 휘말렸다. 6월 27일에 스탈린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유린되었으며, 국경에 있던 기존 병력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으로 소련이 얻은 영토를 모두 돌파해서 예전의 소련 국경 관문도시인 [[민스크]]에 도착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립을 지키던 [[헝가리 왕국]]마저 독소전쟁에 참전하면서 전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헝가리의 독소전쟁 참전은 좀 복잡한 내면이 있는데. 헝가리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 1차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처럼 참전파와 중립파가 싸우고 있는 상태였다. 참전파는 독일 편에 참전해 승리의 과실을 얻고 향후 생길 트란실바니아 문제에서 독일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립파는 소련을 침공할 명분이 없다고(독일과 헝가리간 추축조약은 조약국이 타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할 경우에만 도울 의무가 있었다) 주장하며 싸우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 26일 신원 미상의 폭격기 3대가 헝가리의 도시인 [[https://www.origo.hu/tudomany/20170626-a-kassai-incidens-miatt-lepett-be-a-szovjetunio-elleni-haboruba-magyarorszag.html|커셔(Kassa, 현 슬로바키아 코시체)를 폭격했고]], 이 폭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군 수사관들이 사용된 폭탄이 소련제라고 주장했다(그 외에 폭격기 3대에 소련 공군 마크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마크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라 커셔 폭격의 주범이 소련이라고 생각한 헝가리는 그 다음날인 6월 27일, 라즐로 바르도시 총리가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에서 대소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독소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다만 아직까지 커셔 폭격의 주범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주범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소련의 의도적인 폭격이라는 주장부터, 또는 소련 공군이 슬로바키아를 폭격하려다 실수로 헝가리를 폭격했다는 주장, 독일이 헝가리를 독소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주장, 또는 독소전쟁 참전을 위한 헝가리의 자작극이라는 주장, 아님 [[루마니아 왕국]]이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공격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이때 스탈린은 통치를 그만두고 자기의 다차(러시아식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추측밖에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스탈린은 정치적 천재였고, 권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실패를 덮고,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수 있다. 이런 행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절대권력자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일원화된 체계 하에 통제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스탈린의 부재가 더 심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등비등한 약자끼리 하는 주도권 싸움이 소련을 붕괴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소련 정부의 수뇌부는 스탈린을 찾아가 그의 복귀를 호소하였고, 그를 공산당의 최고 직위와 정부 최고 직위에 오를 것을 호소했다. 놀랍게도 스탈린은 당 총간사 직위 외에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소련의 복잡한 정치체계로 인해 평시에는 그렇게 해도 스탈린이 소련을 충분히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몇 번 거절하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7월 3일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재등장에 안심했다.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nopad> [youtube(Z4X-uBtJPaw)] || || [[영국 본토 항공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 개요 및 남부전선 상황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536349><nopad> [youtube(uoJzjWJb1dY)] || || 중부전선과 북부전선 및 [[계속전쟁]] 상황 ||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북부집단군은 [[시가전]]을 피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공방전|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도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키에프에 소련군이 집중되면서 소련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독일은 중부집단군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게 했고 [[키예프 전투(1941년)|제1차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이 대규모 섬멸을 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게 되었다. 이렇게 소모한 시간은 [[모스크바 공방전]] 중반 이후에 결정타를 먹이게 되는데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전진하는 중간에 [[비]]가 내리면서 러시아 전역이 악명높은 [[라스푸티차|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군마들은 진흙탕에 빠져 죽었고 턱없이 부족한 보급 차량들도 진흙밭에 빠져 망실당하기 일쑤였다. 원래 독일군은 단기 결전을 계획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군한 상태였고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징집을 시작해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을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느린 진격은 점점 더 느려졌다. 그리고 소련군의 병력 증원은 놀라워서 전쟁 초에 독일은 소련군이 180여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추정했고, 작전 초에 이 병력들이 모두 궤멸당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독일군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소련군 '''360여개 사단'''과 마주쳐야 했다. 독일은 이렇게 되서야 일본에게 소련을 공격해 줄 것을 제대로 요청했지만, 일본은 '''당연히''' 가만히 있었다. 당시 소련과 일본은 [[할힌골 전투|소련이 일본을 실컷 두들겨팬 뒤]] 서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애초에 독일 측은 일본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알리지조차 않았다. 단지 독일 군부 혼자서"우리가 공격하면 일본군도 같이 가세하겠지?"라고 안일하게 [[망상]]했을 뿐이다. 결국 독일군은 마지막으로 모스크바 점령을 시도해서 모스크바 코 앞까지 도착했으나 때마침 소련 측에서 '''일본이 참전하지 않을 거란''' 첩보를 받았고 바로 일본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 중 25개 보병사단과 9개의 기갑여단들을 모스크바로 재배치한다. 예전부터 소련은 일본의 야욕을 경계해왔고 [[하산 호 전투]]와 [[할힌골 전투]]로 실제 경험도 해봤기에 소련은 모스크바가 넘어갈까 말까하는 이때도 일본을 염려하여 30여 개 사단은 극동에 남겨놨으나 일본이 소련에 침공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병력을 모스크바로 동원한 것이다. 이후 독일은 소련군의 반격을 받았고 [[겨울]]이 되어 러시아의 강추위가 몰아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약 30km 앞에 두고 공격을 포기했다. 독일군의 진군이 세 갈래였던 만큼 전역도 크게 3곳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독일의 북부집단군이 소련의 북부방면군[* 북부전선군과 북서전선군 지휘]을 상대한 북부 전구에서는 리투아니아-라트비아-나르바/페이푸스호/프스코프-레닌그라드/일멘호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북부 전구에서의 주요 전투로는 [[라세이냐이 전투]], [[레닌그라드 공방전]] 등이 있다. 독일의 중부집단군이 소련의 서부방면군[*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 브랸스크 전선군 지휘]을 상대한 중부 전구에서는 민스크-스몰렌스크-르제프/뱌지마/오룔-칼리닌/모자이스크/툴라-모스크바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주요 전투로는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1941)|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등이 있다. 독일의 남부집단군과 루마니아군이 소련의 남서방면군[*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 지휘]을 상대한 남부 전구에서는 리보프/브로디/코벨-우만/오데사-키예프-쿠르스크/하리코프-로스토프를 따라 전투가 이어졌다. 주요 전투로는 [[브로디 전투|제1차 브로디 전투]], [[우만 전투]], [[키예프 전투(1941년)|제1차 키예프 전투]], [[로스토프 전투|제1차 로스토프 전투]] 등이 있다. 한편 소련은 독일이 침공하면서 서쪽에 있던 공업 지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음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한 끝에 공장의 설비들을 동부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공장 지대는 이후 대전 내내 소련군이 싸우는 무기를 공급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과정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이 흘러간다. 당연히 중앙은 전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공장의 소개와 대피가 중앙의 조율 아래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어떤 기차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했으며, 소개하여 피난을 갔다가, 피난처로 독일군이 진격하는 바람에 또다시 피난 가야 했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다행히 서쪽에 있던 대부분의 공장들은 [[우랄 산맥]] 부근으로 안전하게 이송되었고, 1,500개의 주요 공장 중에 1942년 말까지 단 55개 만이 이전된 곳에서 재가동에 들어가지 못했다. 1941년 후반기까지 2,600개의 기업체가 옮겨졌으며, 2,50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공장을 따라 이동하였다. 옮기지 못하는 생산 시설은 독일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청야전술|철저히 파괴했다.]] 이러한 결정은 독일군에게 있어서 두 가지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다. 먼저 독일군은 소련의 군수 공장들을 점거해 소련의 생산력을 완전히 말소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예상을 깨고 소련은 서부의 공업시설들을 그야말로 대이동시키는데 성공했고 온전히 물자와 장비가 생산되어 소련군의 전투력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광활한 거리의 보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무타구치 렌야|소련 기관차들을 노획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유가 없던 것은 아니고 소련의 철도와 독일의 철도 규격이 전혀 달라서 소련은 [[광궤]]를 사용했고 독일은 [[표준궤]]를 썼기 때문에 소련 영토 내부의 철도를 사용하려면 소련 기관차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소련의 기관차들은 '''산업 시설들을 이전하면서 상당수가 짐을 싣고 우랄로 후퇴한 상태였고''' 일부 기관차를 노획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최전선의 약간 후방에서 소련군에게 보급을 해주다가 폭격맞고 박살나거나 소련 기관차에 근접한 독일군이 소련군이 열차를 이용해서 후퇴하는 것을 막으려고 기관차를 공격하거나 하는 사태로 인해 파괴가 극심했으며 심지어 기적적으로 멀쩡하게 노획한 소련 기관차를 독일 철도부대가 인수하기도 전에 현지 독일군의 부주의나 사고등으로 파손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독일의 손에 넘어가서 정상적으로 사용중인 소련 기관차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독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점령지에 있는 소련의 철도를 공병들을 투입하여 철도를 억지로 개궤시키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과정을 거쳐서 광궤를 표준궤로 만든 후에 독일의 기관차들을 보냈지만, 문제는 독일의 기관차들은 기후가 온화한 서유럽이나 중부유럽 기준으로 제조되었기 때문에 '''소련의 추위를 버티지 못해서 결빙이 발생하고 출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덤으로 기관차의 숫자도 부족하고 개궤한 철도의 길이도 모자라서 표준궤와 광궤가 만나는 환승역에서 대규모 교통체증 및 혼란이 발생하여 독일군의 보급에도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독일군은 히틀러가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에 병력을 올인하지 않고 [[키이우|키예프]],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분산하여 투입하였다. 나름대로 이상적인 판단을 한 것이지만, 나폴레옹 시절의 모스크바 일대와는 달리 당시 모스크바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 도시라 점령당하는 순간 유라시아 일대는 철도망이 한순간에 마비돼버리는 효과가 있었기에 전략적인 판단 착오였다. 처음부터 모스크바에 집중했다면 프랑스 침공시기처럼 운이 크게 작용하지만 단기전으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있던 것이다.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의 탄압을 받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많아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동유럽 나치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뉴스가 나오면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 편을 들어 싸웠던 사람들, 특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주민들의 이야기가 꼭 나온다. [[볼셰비키]] 군대에 대항한 독립 투사들로 평가받기도 하고, 인종청소(유대인) 독일 [[파시스트]]들의 앞잡이로 평가받기도 한다.] 처음 점령지에 진주한 독일 전투 부대 중에는 점령지 주민들과 사이가 괜찮은 부대도 존재했으나, 기본적으로 나치의 인종차별 사상에 찌든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점령지 주민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 것에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전투 부대가 떠나고 [[아인자츠그루펜]] 등 인종 말살 부대가 진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독일이 점령한 벨라루스]]에서는 독일의 만행으로 '''시체로 이루어진 지층이 형성될 정도였으며''', 적어도 1천만이 넘는 소련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수많은 소련의 대도시들도 독일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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